Hated : 소감
토무2023-08-26 00:47

❗ 주의: 아동성폭행, 아웃팅 언급 ❗





객관적이길 실패해서 리뷰보단 소감.


1. 곡이 공개되기 전날 밤에 곡에 대한 가수의 메세지가 계정에 올라왔는데 읽고 나서 참담한 마음이 정말 많이 들었다.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곡에 쓰는 마음을 나는 아마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뮤비 공개 카운트다운을 위해서 유튜브 링크가 함께 올라와 있었는데 그 영상 더보기란에 가사가 그대로 있었다. 곡이 나오기 전에 가사를 전부 읽은 건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는데 그걸 보고서는 진짜 착잡했다. 이 곡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하는 고해인데 그 고해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2. 영블러드에게 정신 건강 문제가 있다는 건 곡 몇 개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멘탈 헬스 이슈를 직역하니까 진짜 냉혹하게 들리네. 애초에 터부가 될 수 있는 이슈를 목 놓아 이야기하고 더 나아지자고 이야기하는 게 가수의 브랜드고, 또 정도는 각자 다르겠지만 요즘 테라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겠어. 물론 그 주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족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도 파악하기 쉽다. 여동생을 정말 사랑한다는 건 인터뷰 몇 개를 보면 알 수 있다. 'Hated'에서 언급되었듯 솔직한 가수라서 가사를 보고 더 충격을 받았을 수 있겠다. 나는 아이돌이든 일반 가수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인데, 영블러드는 약간 자기 안에 무덤을 파서 거기서 나온 해골들을 꺼내 얘기해 주는 느낌이라 항상 걱정이 된다. 같이 괴로워하는 이가 있으니까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메세지를 늘 이야기하는 가수로서, 무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3. 동시에 고해함으로서 생기는 카타르시스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이 곡이 완전히 이타심으로 나온 곡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가수한테도 못할 짓이고. 내가 그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4. 곡이 공개된 24일 밤 11시에는 곡을 듣기가 무서웠다. 곡 가사는 아는데 도대체 어떤 곡일지 감이 안 와서. 들으라고 만든 곡인데 내가 이걸 들어도 되나 싶었다. 곡을 다 듣고 나서는 일단 정말 참담했고, 이 곡을 듣고 분명 누군가는 위로를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나에게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고.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그 작품을 접한 사람 수만큼 새롭게 재창조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내 마음대로 이 이야기를 가져가서 빚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계속되는 테마를 알겠는가?


5. ‘이 이야기를 내가 들어도 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와 ‘들으라고 낸 곡인데 어떻게 다룰지는 나한테 달렸지’가 계속 싸우는 중이다.


6. 근데 그 와중에 코러스가 또 중독적이에요. ‘몰랐던 좋은 곡’이라는, 좋아하는 곡을 담아 놓는 스포티파이 플리가 있다. 이 곡을 거기 넣기 위해 플리 이름을 바꿨다. 좋은 곡은 맞는데, 이걸 또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지금 플리 이름은 '♥'이다.


7. 영블러드가 당한 피해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부족한 지식과 경험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도 아니다. 피해자가 겪은 고통은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고, 다만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한 성인들의 머리를 뽑아버려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교화의 가능성을 주는 건 불필요한 사치다. 또한 영블러드가 가한 가해를 판단할 권리는 나에게 없다. 그러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영블러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뚝뚝 떨어지는 자기혐오를 들으면서 나만 그 오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위안을 얻었다면 내가 뭐가 되지? (당연하지만 성범죄자의 입장에 이입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8. 벌스에 비해 후렴은 좀 보편적인 정보라고 느꼈다. 누군가는 내가 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미움을 받는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전부터 반복되어 구전설화처럼 전해지는 말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살아내려면 바닥을 쳐야 하고, 내가 원하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후자는 조금 애매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내게도 누군가에게서 미움을 받는다면 너는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라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았던 시기가 있는데, 그 문장은 사실일지언정 자기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미움을 받고 싶어 하겠어. 저 말을 속으로 되뇌려면 미움을 그만큼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의 평범한 학생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받는 미움은 종류부터 다르겠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외로웠던 것 같다.


9. 뮤비에 한국어 가사 번역본 자막도 있다. 저번 로우라이프 때도 있었는데 신기했다. 그리고 그 한국어 자막을 눌러 보기가 진짜 무서웠다. 영어로 받아들이는 정보 값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했다. 분명 누군가가 이걸로 논문을 쓰지 않았을까?


10. 그런데 이 한국어 자막이 개쓰레기라 차라리 영어 가사에 파파고를 돌려 보기를 추천한다. 중요한 가사를 죄다 엉망으로 틀려 놔서 앞 세 줄 가사 읽고 때려쳤는데, 그 후 상태를 보려고 끝까지 틀었을 때는 기겁을 했다. 이 자막은 공포다. 해석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틀린 번역이다. 원곡 가사랑 한국어 번역이 전하는 정보가 아예 달라서, 노래 공개되고 세 시간 만에 가사 오역 중 심각한 부분만 추려내서 메일을 쓰고 영블러드 인스타 디엠으로 쏴 보냈다. 파란 딱지 달린 인스타 공식 계정이니까 아마 매니지먼트가 확인하겠지 싶었다. 한국어 자막 수정 부탁해... 디엠 확인 못하면 어쩔 수 없고.


11.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가수한테 직통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레이블 이메일 주소를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잘못한 건 자막이지 내가 아닌데 이 오역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2차 가해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디엠을 읽는다면 제발 가수가 아니라 매니지먼트였으면 좋겠다.


12. 가수는 어디까지 공유해야 하는가? 물론 정보를 걸러낼 수 있는 입장에서 ‘가수가 원하는 만큼’이 답이긴 한데, 어느 정도가 가수와 리스너 사이의 건강한 거리일까? 아이돌 팬덤은 가수가 한 처먹이는 게 그렇게 싫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치면 이 곡은 한의 집합체다. 하지만 자신을 위장한 채로 예쁘게 웃기만 하는 가수를 사람들이 좋아할까? 아마 아닐걸.


13. 모든 것이 수치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진솔함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진솔함은 진솔한가? Kesha의 'Fine Line'이라는 곡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의 가수의 자조를 볼 수 있다. ‘오락거리와 그저 고통을 착취하는 것의 차이는 아주 아슬하게 갈려/하지만, 야, 우리가 나를 이용해 번 돈을 좀 봐’. 케샤와 영블러드의 상황은 다르지만 그들의 진솔함과 그들의 고통이 돈을 벌어온다는 점은 동일하다. 당장 나만 해도 글을 쓰고 있지 않나. 모두가 남의 이야기에 한마디씩 얹고 싶어 한다. 그게 유명한 가수라면 더욱 그렇겠지. 깔끔하게 결론을 낼 수 있는 논제는 아니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다만 다각도로 생각해 보는 것 정도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14. 이런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영블러드의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한다. 10월 한국 콘서트도 기대하고 있다.